제목 "장성순의 추상미술 1950~60년대를 중심으로" 김이순 | 미술사ㆍ홍익대학교 부교수


"장성순의 추상미술 1950~60년대를 중심으로"

김이순 | 미술사.홍익대학교 부교수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장성순(張成旬, 1927-) 화백은 해방 이후 한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첫 번째 세대다.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해방 이후에 남하하여 서울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지만 청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현대미술가협회악뚜엘(Actual)의 창립멤버로 활동하면서 한국 현대미술 여명기(黎明期)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장성순 화백이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6.25전쟁으로 많은 것을 상실했지만 한편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미술계도 서양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하면서 일제시대 미술과는 다른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고, 미술가들의 의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물론 해방 이전에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다닌 戰前 세대가 중견작가로서 미술계를 이끌어가고 있었고,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같은 모더니스트들은 한국 모더니즘 발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큐비즘적인 요소 혹은 몬드리앙에서 발전한 구성주의적인 요소를 반영한 추상미술을 구사하고 있었으며 미술의 순수성과 조형성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戰前 세대가 추구하던 화면의 조화를 근간으로 하는 추상미술은 戰後 세대의 작가들에게는 호소력이 없었다. 전쟁에 참여했거나 사춘기에 전쟁을 겪은 전후 세대의 미술가들은 국전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화풍은 물론, 절제되고 세련된 조형언어로 구사된 추상미술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감정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고, 뜻을 같이하는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술가협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협회의 창립회원은 장성순을 비롯해서 문우식, 김청관, 김종휘, 김창열, 김서봉, 하인두, 조동훈, 이철 등이었는데, 기존의 미술단체들이 학연이나 지연으로 결성되었던 것과 달리, 조형의식을 같이하는 미술가들이 모인 단체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들은 19575월에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는데, 창립전 서문에는 "우리는 作畵와 이에 따르는 회화운동에 있어서 작화정신의 과거와 변혁된 오늘의 조형이 어떻게 달라야 하느냐의 문제를 숙고함과 동시에 문화의 발전을 저지하는 봉건적 요소에 대한 안티테제를 모럴로 삼음으로써 우리의 협회 기구를 갖게 되었던 것" 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서문은 김창열과 문우식이 작성했는데,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술의 형식이나 화풍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정신적으로나 조형적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을 가장 중요한 모토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립전에 전시되었던 작품들은 대부분 분실되어 현재 그 내용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해바라기>,<소년>,<제철공장>,<굴성쇠와 까스 탱크> 같은 작품 제목들이 자료로 남아 있는데, 구체적인 대상물을 지시하는 제목인 것으로 보아 작품의 표현양식 역시 형상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평론가 이경성은 이 창립전에 대해 주목하였다. "물체는 이미 가시적인 결합을 벗어나 元素 하나하나가 부재를 주장하고 꿈과 현실은 하나로 환원되고 의식과 무의식, 합리와 불합리는 같은 가치에서 공존"하는 작품들의 전시이며, "기성의 모든 권위를 못 믿겠다는 불신"을 갖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조형언어로 보았다. 흔히 한국 현대미술의 시작을 앵포르멜 미술로 간주하고 1958년 제3현대미술가협회전시회에 출품한 박서보의 <회화 no.1>을 주목하면서 그 이전의 작품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미 창립전에서부터 회원들은 기성세대의 미의식에 대한 저항의식을 갖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장성순 화백이 창립전에 출품했던 <소년>이라는 작품은 현재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어떠한 작품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현존하는 작품들 중에서 1957년의 <풍경>이라는 작품을 통해 당시 작품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풍경>은 집의 형상을 단순화시켜 평면적으로 처리한 작품이다. 집 형상의 외부는 회색과 청색의 단색조 색면으로 처리했고 그 내부는 집 형상과 꽃나무로 보이는 형상이 겹쳐 있으면서 크고 작은 기하학적인 면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 큐비즘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인 요소가 혼재하는 반추상 작품이다. 즉 아직 戰前 세대의 모더니즘 계열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1957년 말엽에 장성순의 미술에 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 화백이 195712월에 있었던 제2현대미협전에는 5점의 작품을 출품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이라는 작품이 The Korean Republic에 실려 있다. 이 신문에서는 특별히 장성순에 주목하고 그의 작품에 대한 내용으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극심한 가난에 속에서도 창작활동을 하는 점과 함께 <>이라는 작품이 서체추상적인 요소가 강하고 양식적으로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의 이라는 용접조각 작품과의 유사성이 보이지만 장성순은 데이비드 스미스의 작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 있는 점은 이미 1957년에 한국 작품과 미국 작품과의 유사성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문에 실린 흑백사진으로는 이 작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사람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대담한 붓질로 표현되어 있다. 달을 향해 비상하는 인간의 형상을 추상화 시킨 작품이며 서체적인 붓터치를 사용했지만 서양의 서체추상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작가는 회고하고 있다. 장성순은 돌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돌 표면의 거친 질감에서 서체적인 형상을 끄집어냈다고 한다. 다시 말해 1957년에 장성순은 아직 서양의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 미술을 수용했다기보다는 돌의 거친 표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우연적인 효과를 살리는 작업을 했다. 이후에도 그는 돌의 표면 질감을 화폭에 담으려는 노력을 한동안 지속했는데, 당시에 돌을 표현하게 된 이유에 대해, "돌은 말이 없으면서 오랜 세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나는 그 숨겨진 세계와 대화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돌의 표면에 대한 관심은 19585월에 열렸던 제3현대미협전에 출품했던 <돌에서>라는 작품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박서보의 <회화 no.1>과 함께 3회전에 출품되었던 <돌에서>는 역시 일간신문에 실린 흑백사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얼핏 완전 추상 작품으로 보이지만 작가는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표현하려 했고 돌의 표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경성은 이 작품에 대해 "皮膚感覺的緯度에서 환상을 정착하려 무척 애를 쓰고 있다. 만들어진 우연 속에서 효과를 바랐고 투명해지려고 노력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제3회전에 대해 이경성은, 고통, 형식부정, 비합리성, 비극, 형상의 부정, 우연, 비애, 불안 등과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전후세대가 경험했던 절망, 고독을 창조로 승화시켰다는 매우 시사적인 평을 하였다. 그는 전후세대의 작품들이 김환기, 유영국과 같은 戰前세대의 서정적인 조형언어와 차별화된 작품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이를 시대적인 상황에 반영된 미술로 평가하고 있다.

 

  장성순이 완전히 추상미술로 들어선 것은 1959년경이다. 현존하는 작품 중에서 1959년 작품이 세 점 남아있는데, 모두 <작품>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으며, 더 이상 구체적인 형상을 찾아볼 수 없는 비정형의 추상작품이다. 세 작품의 표현양식이 약간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물감이 불규칙하고 두텁게 발라져 있으며 흘러내린 흔적이 있어 물질감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표현은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적인 요소가 혼재된 것이라고 하겠다. 장성순은 당시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당시 미국문화원에서 우연히 타피에스, 슐라주 화집을 봤는데, 아주 쇼킹했어요.... 그 때까지 나는 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려왔는데, 두꺼운 마티에르가 있는 타피에스, 서체 같은 슐라주의 그림이 확 들어오더라고. 체질적으로 맞거든.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추상 쪽으로 하게 됐어요.

 

  돌의 표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서체적인 표현을 구사하고 있을 때, 서양의 앵포르멜 회화 중에서 서체적인 붓질을 사용한 작품을 접하면서 보다 자신 있게 자신의 추상세계를 전개시켜 나갈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196012월에 있었던 현대미협전에 장성순은 완전히 서체적인 추상작품인 <작품7>을 출품했다. 당시 일간신문에 이 작품이 실려 있으며, "본능적인 우연성으로 동양의 書藝觀을 되미는" 작품이라는 언급이 있다. 요컨대, 서양의 앵포르멜적인 화풍을 구사하면서도 동양의 서체를 연상시키는 필법을 선택한 것인데, 이는 자신의 감수성에 적합한 서양의 추상언어를 발견한 것이며 이를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장성순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추상미술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담대한 서체적인 붓질은 요즈음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현대미술은 분명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196012월에 있었던 현대미협6회 전시회를 개최할 즈음에는 앵포르멜 화풍이 한국 화단에 크게 확산되어 있었다. 당시 현대미협의 전시장 분위기를 다음과 같은 평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3,4백호의 '칸봐스'를 포함한 무정형 비형상의 본능적인 추상화 80점이 진열되고 있다. 대체로 흑색의 狂亂驅使와 짜증날 만큼 灰褐을 무질서하게 동원시키고 있는 이들의 공통적인 현실적 對造形感賞은 한말로 문명의 잔해 혹은 자연과 함께 인간의 형상이전의 생태 같은 것을 암시해 준다." 요컨대, 현대미협전에 출품한 앵포르멜적인 작품들은 당시 전후 사회에 팽배해 있던 실존적인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미술로, 시대를 대변하는 미술로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현대미협회원들의 열기와 이들보다 젊은 세대의 결집체인 60년 미술가협회와 결합되면서 더 큰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 두 단체는 196110월에 연립전을 개최하였고 젊은 세대들은 그 열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들은 "지금 ''는 덥기만 하다. 지금 지글지글 끓고 있는 것이다"라는 식의 선언 문구로 자신들의 에너지와 의욕을 과시하였다. 이듬해 악뚜엘을 결성하고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그러나 전시회는 단 2회로 그쳤다. 이미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성순은 악뚜엘창립회원이었고 앵포르멜 작가들만의 마지막 전시회가 되었던 제2악뚜엘까지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한국 현대미술 여명기 그 중심에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성순은 한국 대표작가로 비엔날레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1960년 동경비엔날레에 <작품A>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표면의 미묘한 요철로 물질감이 강조되어 있으면서도 서체적인 붓질이 강조되기보다는 대담한 원색에 푸른 사각형을 배열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한스 호프만의 회화를 연상시킨다. 호프만은 사각형의 색면들을 불규칙하고 자유로운 붓터치가 있는 배경에 배열한 화풍으로, 유럽의 구성주의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접목시킨듯한 화면을 구사했던 작가다.

 

  장성순은 1961년에 파리비엔날레에도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파리를 여전히 미술의 중심지로 여기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젊은 작가라면 이 비엔날레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1961년 파리비엔날레만 하더라도 많은 작가들이 참여를 원했기 때문에 공모전 형식으로 참여 작가를 선발했다. 1961년 파리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했던 작가로는 장성순 이외에 정창섭, 김창열, 조용익이 있는데, 모두 앵포르멜적인 작품을 제작하던 작가들이었던 점으로 보아, 이미 앵포르멜 미술은 한국미술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성순은 이 공모전에 <0의 지대>라는 제목의 작품 두 점과 함께 <작품 no.7>을 출품하였는데, 그 중에서 실제로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품은 <작품 no.7>이다. 이 작품은 현재 흑백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경제사정상 반송비를 지불하지 못해 돌려받지 못했고 현재 소재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주불 한국대사관에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작가에 따르면, 50호정도의 크기였고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기 때문에 미군 천막용 천을 잘라서 캔버스를 만들었으며, 물감도 없어 자신이 화이트를 만들어 캔버스에 나이프로 문지른 후 테라핀을 뿌리고 태운 작품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제작과정에서부터 현재 작품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1960년대 초반의 미술계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61년에 제작한 두 점의 <0의지대>는 불규칙한 화면에 물질감이 강조되어 있다. '0의 지대'라는 제목은 아무 것도 없는 '제로'상태를 의미하며 처참한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문명의 잔해와 같고 인간의 형상 이전의 생태와도 같은 표현으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장성순의 화풍에 변화가 왔다. 그러나 다양한 재료나 물질에 관심이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거즈를 캔버스에 붙이면서 물질감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는가 하면, 1960년대 후반기에는 앵포르멜적인 불규칙한 표현이나 표면의 질감을 강조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비교적 차분한 단색조의 화면을 구사하면서 점차 서정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추상작품으로 나갔다.

 

  장성순은 일관되게 추상적인 표현을 고집하고 있다. 그는 뛰어난 뎃상력을 갖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사실재현적인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추상미술에 몰두하는 이유는 추상적인 표현에서 무한한 정신적인 자유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서체적인 추상을 이미 1950년대에 시작해서 현대까지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자신의 체질과 감수성에 맞는 조형언어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조형언어를 돌의 표면에서 발견했지만 1960년 전후에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 같은 서양의 조형언어와 만나면서 보다 대담한 추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분위기가 감도는 언어로 바뀌었다.

 

  장성순 화백은 6.25전쟁 이후 어려운 시절에 전업 작가로 살아온 예술가의 상징적 존재이다. 청력이 약해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고, 전업작가로 살면서 작업공간이 없어 야산에서 겨울에 방한모를 쓰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이러한 악조건에 굴하지 않고 창작활동을 지속시켜 지금까지도 서정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을 제작하면서 한국 현대 미술 형성에 일익을 담당했다.